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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가에서] 위험투성이 이상한 모래밭
[창가에서] 위험투성이 이상한 모래밭
  • 이민규 기자
  • 승인 2018.03.19 09: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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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어릴 적 모래밭에서 놀던 추억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고사리 손으로 모래집을 만들어 놓고 정겹게 두꺼비를 불렀다. 두꺼비가 흥겨운 노래를 듣고, 튼튼한 새집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 시절 모래밭은 꿈과 희망을 잉태하는 곳이었다. 참으로 자유로웠고 편안했다. 넘어져도 다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안전한 곳이었다.

최근 경제·사회분야에서 널리 쓰이는 ‘규제 샌드박스(Regulatory Sandbox)’라는 단어에도 유년의 모래밭에 담긴 자유로움과 편안함, 안전함이 배어난다.

‘규제 샌드박스’란 말 그대로 규제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하게 뛰어놀 수 있는 모래 상자를 뜻한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 비즈니스 모델 등을 마음껏 시험해 볼 수 있는 공간이란 의미를 지니게 됐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기조인 혁신성장도 ‘규제 샌드박스’를 지렛대로 삼고 있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지닌 기업인이나 기술자들이 불합리한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에서 창의와 혁신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는 의미다.

최근 정부 여당이 발의한 △행정규제기본법 개정안 △금융혁신지원법 제정안 △산업융합촉진법 개정안 △정보통신융합법 개정안 △지역특구법 개정안 등 소위 ‘규제혁신 5법’도 규제 샌드박스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 ‘규제혁신 5법’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손해배상 규정이다. 규제특례를 받아 제공되는 신기술·서비스로 인해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다면 고의나 과실이 없더라도 해당기업이 이에 대한 배상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내용을 짚어보면 ‘규제혁신 5법’의 입법취지와 실효성에 강한 의구심을 갖게 된다.

초창기 벤처기업이나 창업기업은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무르고 연한 신기술의 뿌리를 튼튼하게 키워가기 마련이다.

그런데 소비자 보호를 명목으로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는다면 어느 기업이 담대한 도전에 나설 수 있을까. 뒤뚱거리다 넘어졌을 때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릴 수밖에 없는 곳이라면 과연 안전한 모래밭이라 할 수 있을까.

결국 ‘규제특례로 인한 손해배상 규정’은 창의와 혁신을 지향하며,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 개발을 준비하는 기업들의 의지를 반감시키는 독소조항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규제혁파를 위해 이명박 정부는 ‘전봇대’를 뽑으려 했고, 박근혜 정부는 ‘손톱 및 가시’를 제거하려 했다. 그 시도에는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으나, 당초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선 기업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실행전략의 그물을 촘촘하게 엮지 못했던 까닭이다.

세계 최고의 혁신기업으로 꼽히는 아마존의 최고경영자(CEO) 제프 베저스는 지난해 한 경제지와의 인터뷰에서 “큰 성공은 수십 번의 실패가 쌓인 뒤에야 온다”면서 “CEO로서 나의 일 중 하나는 직원들에게 실패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패할 수 있는 용기가 찬사를 받는 ‘규제 샌드박스’에서 창의와 혁신의 꽃이 아름답게 피어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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