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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망 발전사②] 공중망 투자…인터넷 강국 씨뿌리다
[통신망 발전사②] 공중망 투자…인터넷 강국 씨뿌리다
  • 차종환 기자
  • 승인 2021.10.31 20: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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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선 기반 PC통신 등 인터넷 ‘초석’
T1급 백본망…상용 가입자 폭발적 증가

카폰∙삐삐 등 1세대 이동통신 눈길
부 과시∙숫자메시지 등 문화 자리매김
공중전화 박스는 삐삐 호출에 응답하려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공중전화 박스는 삐삐 호출에 응답하려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정보통신신문=차종환기자]

[연재] 정보통신망 발전사 - ②데이터 통신

우리나라 데이터 통신을 논할 때 1980년대를 빼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통신시설의 대량 확충과 현대화가 본격화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통신부문 매출액의 절반 이상을 통신시설 확충과 현대화에 투자했고 이는 국내 총생산의 1~2%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통신부문의 양대 목표였던 전화 적체 해소 및 전국 전화 자동화가 달성되면서 정부는 점차 통신망의 질적 고도화, 국민 편익 제고,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정책 등에 관심을 갖게 됐다.

주요 기술 및 장비의 외산 의존도를 해결하기 위해 교환기 기술 국산화가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전전자교환기(TDX) 국산화,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세계 최초 상용화 등으로 연결됐다.

이러한 정책적 성공 경험은 1990년대 이후 초고속정보통신 기반 구축, 취약계층 정보격차 해소, 초고속 국가망 및 활용 서비스, 전자정부 등의 정책이 이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데이터 통신의 시작

통신의 정보전달 능력이 컴퓨터의 정보처리 능력과 결합해 데이터 통신이라는 새로운 서비스가 탄생했다.

선진국을 중심으로 각종 단말기와 컴퓨터를 연결하는 공중형 데이터 통신망이 구체화됐으며 이를 위한 국제적 규범과 표준화도 진행됐다.

우리나라의 데이터 통신은 1980년대 초반까지 전용회선을 통해 주로 이뤄졌으며, 전용회선은 당시에 가장 일반적인 데이터 통신망으로 사용됐다. 주로 은행 서비스, 비행기 및 열차의 좌석예약시스템 등에 사용됐다.

정부는 1982년 3월 한국전기통신공사와 민간 기업들이 공동으로 출자한 한국데이타통신(이후 데이콤)을 설립해 데이터 통신을 전담하도록 했다. 한국데이타통신은 공중정보통신망을 구축했으며 국내외 연결서비스·전자사서함·비디오텍스 서비스 등 다양한 데이터 통신서비스를 개발·보급했다.

기술의 발전은 전화회선에 여러 형태의 단말장치를 부착함으로써 공중전화망을 데이터 통신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PC∙신용카드 조회기 등을 전화회선에 접속해 모뎀으로 PC통신이나 신용카드 조회 등을 시도하는 통신 형태가 대표적인 예다.

이처럼 전화망을 활용한 데이터 통신은 최근 초고속인터넷 접속이 활성화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반화된 데이터 통신이었다.

 

■통신강국의 발판 ‘인터넷’

현재 웹 기반 인터넷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PC통신 접속 화면. [사진=나무위키]
PC통신 접속 화면. [사진=나무위키]

인터넷은 1969년 미국 국방부 산하 고등기술연구소가 소련의 핵 공격에 대비해 정보교류망 구축과 이에 관련된 연구 및 기술 개발을 시작하면서 등장했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터넷은 1982년 서울대학교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현 ETRI) 사이에 TCP/IP를 이용해 구축한 네트워크였다. 이는 연구망으로 주로 사용되다가 ‘하나망’이라는 이름으로 통합돼 1990년 미국 하와이대학과 연결되면서 인터넷 시대가 열리게 됐다.

데이콤은 1986년말까지 국내 접속지점을 21곳까지 확장하고 PC통신의 효시인 천리안 서비스를 개통해 전국 어디서나 정보통신 서비스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했다. 해외 52개국과도 연결 서비스를 제공했다.

1992년에는 한국통신이 하이텔을 만들어 PC통신 서비스를 제공했고 이어 나우콤의 나우누리, 유니텔 등의 사업자가 연달아 출현했다.

1994년은 국내 인터넷 대중화의 원년이었다. 한국통신의 코넷(KORNET)이 등장하면서 일반인도 누구나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국 11개 주요 도시에 T1급 백본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본격적인 인터넷 상용서비스에 들어갔다.

이후 인터넷 이용자는 폭발적으로 증가, 1995년부터 전국망 및 국제망 확충도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1세대 이동통신 시대 개막

우리나라는 남북 분단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무선통신에 대한 정부 규제에 따라 무선전화 기술은 오랫동안 활성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해외에서는 오래 전부터 무선전화 기술개발이 진척돼 1980년을 전후로 이미 이동전화 서비스가 상용화 됐다.

다급해진 정부는 1982년 ‘이동무선전화 현대화 계획’을 내놓기에 이른다. 1세대 아날로그 방식인 모바일 전화 서비스(AMPS: Advanced Mobile Phone Service)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1984년 5월을 기점으로 AMPS 상용서비스가 개시됐다.

속칭 ‘카폰’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이 서비스는 단말기 값만 300만원에 달했다. 당시 현대 포니엘 승용차 1대 값이 500만원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가격이었다.

‘삐삐’로 통용되는 무선호출 서비스도 빼놓을 수 없다. 1982년 일본 NEC의 제품을 들여와 1만 가입자 회선을 설치하고 그해 12월 첫 서비스가 시작됐다.

당시 공급된 단말기는 총 300대로, 말그대로 ‘삐삐’ 소리만 들리는 방식이었고 서비스도 수도권 일부에만 국한됐다.

차량전화와 무선호출 서비스에 대한 인기는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좋았다. 일부 부유층의 과시용으로 쓰이기도 했지만 일선 현장에서는 이동통신을 이용한 영업활동이 새로운 패턴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었다.

특히 무선호출기는 1990년 중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공중전화 박스는 무선호출에 응답하려는 젊은이들로 늘 붐볐다. 초기에는 짧은 숫자를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는데 ‘8282=빨리빨리’, ‘0124=영원히 사랑해’ 등과 같은 메시지는 하나의 문화가 됐다.

1995년 CDMA 기술이 상용화되면서 2세대 이동통신 시대가 열렸고, 이동통신의 바통은 휴대전화로 넘어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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