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보행자 천국이 교통선진국

2021-02-26     차종환 기자

며칠 전 어느 사거리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신호를 기다리는데 다른 편 길에서 고철이 잔뜩 담긴 리어카를 끄는 노인 한 분을 보게 됐다.

설마 저걸 끌고 건너려고 하시나? 아니나 다를까, 파란불이 들어오자마자 리어카를 힘겹게 끌기 시작하시는데 건장한 성인 남자가 끌어도 힘겨울 만한 육중한 무게로 보였다.

하필 그 쪽 길은 같이 건너는 사람도 없는지, 홀로 힘겨운 발걸음을 옮긴 그는 남은 시간이 다 됐음에도 횡단보도의 절반 정도 밖에 나아가지 못했다. 도로 한가운데 서게 된 것이다!

이윽고 신호등이 바뀌고 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예견된 위험천만한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노인을 지켜보던 맨앞 차들이야 어쩔 수 없이 멈춰 있을 수밖에 없으나 이 상황을 모르는 뒷차들의 경적소리가 사방을 울려댔고, 그 잠시를 못 기다리고 차선을 빠져나온 차들과 진행 차들이 뒤엉켜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굳이 이런 극단적인 사례가 아닌 일반 노약자분들이라도 횡단보도를 건너시는 걸 보면 괜시리 마음 졸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최근 국토교통부가 ‘사람중심도로 설계지침’ 제정안을 내놓은 것에 한시름 놓인다. 도심에서 차량의 주행속도를 낮추고 보행자의 편의성을 향상시키는 데 주안점을 뒀다는 설명이다.

도시지역도로는 시속 50㎞ 이하로 설계하도록 유도하고, 속도에 따라 지그재그 형태의 도로, 고원식 횡단보도 등 교통정온화 시설을 설치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보행자가 많은 이면도로 등은 보행자 우선도로로 계획해, 시속 30㎞ 이하로 주행하도록 설계된다.

환영할 만한 정책이다. 사실, 운전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도심내에서 차를 몰면 아무리 빨리 가겠다고 속도를 내봤자 거기서 거기다.

그렇다면 아예 평균 주행속도를 감소시켜 보행자 사고확률을 확 낮추는 것이 맞다. 일반적으로 시속 60km 이상의 도로는 보행자의 사고 위험이 급격히 증가하지만 시속 50km 이하에서는 사고율이 대폭 감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너무 느려져서 곤란하다 싶은가? 지하철을 타라.

고령자의 느린 보행속도를 감안해 중앙보행섬을 설치할 수 있도록 한 것도 긍정적이다. 서두의 사례를 예방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가 아닌가 싶다.

모든 보행자가 운전자가 되지는 않지만, 모든 운전자는 보행자가 된다. 이 참에 차량 중심으로 이뤄진 국내 지능형교통시스템(ITS) 산업도 보행자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교통선진국을 판단하는 근거는 차가 다니기 좋은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 다니기 좋은 환경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