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은 대한민국 인터넷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날이다. 이름만 들어도 속이 답답한 ‘공인인증서’가 폐지되는 날이다.
거의 20년을 공공기관, 은행 업무 등을 볼 때 ‘내가 나’임을 증명해주던 녀석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니 한편으로 시원섭섭하다.
온갖 암호화 프로그램과 액티브X가 설치되던 것이 없어지면 얼마나 쾌적한 환경에서 업무를 볼 수 있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한 은행에 접속해봤다.
역시나 은행은 발빠른 대처로 공인인증을 제외한 다양한 인증 수단을 마련해 놓았다. 사용자는 가장 편한 방법을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제일 만만한 휴대폰 인증을 해봤다. 늘 그래왔듯, 휴대폰으로 인증번호가 날라오면 그걸 입력하기만 하면 된다. 그 인증번호를 받기 위해 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입력한다. 이래저래 개인정보 이용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체크란도 클릭해주고, 잘 구별도 안 되는 요상한 식별번호도 따라 치라고 해서 입력했다.
몇 초 지나자 휴대폰이 부르르 떨리는데, 무슨 간편인증 앱이 자동으로 열린다. 그 앱에 등록된 비밀번호를 입력하란다. 왠지 등골이 싸하다.
4자리도 아닌 6자리 비밀번호다. 그것도 5회 안에 성공해야 한다. 공인인증은 없어졌는데 스릴이 생겼다.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 가까스로 성공, 간신히 은행에 접속할 수 있었다.
공인인증서로 접속할 때보다 더 지치는 건 기분 탓 일거다. 휴대폰 인증은 나름 구식의 느낌도 있으니 트렌디하게 포털 서비스와 연계된 인증을 해보기로 했다.
또 이름이랑 휴대폰 번호를 치란다. 체크란도, 요상한 식별번호도 마찬가지다. 진짜 저 요상한 식별번호는 알아보기도 힘든 그림으로 짜증을 유발한다.
포털 연계라도 기본적인 인증은 휴대폰이 있어야 되나보다. 간편인증 앱의 비번을 또 입력한다. 도대체 번호를 몇번 치는 건지, 슬슬 부아가 치민다.
해당 포털 서비스마저 비번을 입력하라는 부분에서 그만 포기했다. 공인인증이 사라졌을 뿐 사용자의 편의성은 전혀 개선되지 않은 것이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지막 수단인 간편비밀번호를 해보기로 했다. 해왔던 과정을 밟을 필요없이 PIN 번호만 입력하면 바로 접속이 가능한 방법이리라.
기대가 체념으로 바뀌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간편비밀번호는 그것을 설정하는 데 성공한 이후에나 간편한 거지 그 과정은 또 험난했다.
심지어 그를 위해 다시 공인인증서로 접속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연출됐다. 공인인증을 쓰지 않으니 그 공인인증을 다시 인증하는 꼴이다.
공인인증서의 폐지는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이 사용자의 편의성을 개선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안 하느니만 못한 처사가 될 터다.
이제 민간업체들이 다양한 인증수단을 선보일 것이라고 하는데, 그 업체별 비번을 외우고 있어야 되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스럽다. 부디 편의성이 전제된 인증이 되길 바란다.
좀 있으면 연말정산 시즌인데, 벌써부터 간담이 서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