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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의 침묵…오늘도 무조건 참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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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규 기자
  • 승인 2014.12.02 11: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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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악화·후속사업 영향 등 우려…권리청구·피해보상에 소극적
<건산연 보고서> 공공 발주자 불공정 계약-우월적 지위 남용실태

예산절감체제 개선 없으면 공정거래 확립 요원
제도 집행력 강화할 수 있는 현장의 장치 필요

대부분의 계약서에는 ‘갑(甲)’과 ‘을(乙)’이란 말이 등장한다. 계약의 한 쪽이 ‘갑’이라면, 그 상대방은 ‘을’이다.

이처럼 ‘갑’과 ‘을’은 계약의 쌍방을 지칭하는 단어이지만, 관행적으로 양자의 관계에서 서열의 높고 낮음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됐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갑을(甲乙)’은 “순서나 우열을 나타낼 때, 첫째와 둘째를 이르는 말”로 명기돼 있다.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된 보편적 인식 때문일까?
언제부터인가 ‘갑’은 자신의 이익이나 편리를 위해서라면, 관련규정이나 사회규범에 어긋나더라도 ‘을’에게 온갖 요구와 지시를 할 수 있다는 비뚤어진 인식이 사회 곳곳에 자리 잡게 됐다.

‘을’ 역시 이 같은 인식의 질곡에 묶여 있다. 자신이 ‘을’이라고 생각하면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갑’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갑’에게 밉보이면 모든 걸 잃게 된다는 보이지 않는 공포에 가위눌려 있다.

이런 의식구조 속에서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갑질’이 횡행한다. ‘갑질’이라는 전염병은 다른 사람에게, 다른 조직으로 빠르게 전염된다. 그 와중에 갑을관계는 단순한 계약관계에 머물지 않고 비정상적인 권력관계로 변질된다. 

거의 모든 산업현장이, 특히 일선 시공현장은 유·무형의 갑을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발주처와 원수급사업자, 하청업체로 이어지는 다단계 도급구조 하에서 자연스럽게 갑을관계가 형성된다.

통상의 갑을관계가 그렇듯 발주처는 원수급사업자보다, 원수급사업자는 하청업체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된다.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업자는 합법과 불법, 관행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각양각색의 ‘갑질’을 행한다.

시공현장에서 벌어지는 ‘갑질’은 공공공사와 민간공사를 가리지 않는다. ‘갑을관계’의 보편성은 법과 제도, 제 규정의 잣대가 더욱 엄격하게 적용되는 공공공사의 공익적 가치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특히 공공공사를 집행하는 발주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시공업체의 계약적 권리를 제한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지적이 숱하게 제기돼 왔다.

이와 관련, 한국건설산업연구원(건산연)은 최근 ‘공공 발주자의 불공정 계약과 우월적 지위 남용실태 조사 및 시사점’에 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공공공사 현장에서 벌어지는 ‘갑질’의 빈도와 다양한 유형 등에 대해 상세히 분석하고 있다.

응답자 85% “발주자 불공정 관행” 경험

건산연은 지난 9월부터 11월까지 계약업무와 관련이 있는 건설업체의 본사 및 현장 담당자, 유관협회 담당자, 계약 관련전문가 등을 상대로 설문 및 면담조사를 실시했다.

우선 국내 공공공사 현장의 발주 및 감독기관의 전반적 업무 공정성 수준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중립적 의견인 ‘보통이다’라는 답변(48.6%)이 가장 많았다.

그 뒤를 이어 ‘불공정하다’(28.4%), ‘공정하다’(16.2%)의 순으로 응답비율이 높았다.
응답자 직책별로 보면 공공공사 현장의 발주자를 포함하는 대관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하거나 주관·지원하는 ‘현장책임자’ 또는 ‘공무’의 경우 부정적 인식이 높았다.

이에 반해 현장기술직 또는 관리직의 경우에는 불공정사례를 경험하는 빈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입·낙찰 방식별 공정성은 적격심사제와 최저가낙찰제 등에서 모든 응답자의 부정적 인식이 긍정적 인식보다 더 우세하게 나타났다.

주목할 만 한 점은 유효응답자의 85.3%가 공공공사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주자의 불공정 관행이나 우월적 지위의 남용사례를 경험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경험을 한 응답자는 발주자의 불공정 행위가 해당사업의 원가와 공정수행에 미치는 파급영향이 크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실제로 공사원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설문결과 ‘크다’라는 답변(56.7%)이 가장 많았다. 이어 ‘매우 크다’(28.3%), ‘보통이다’(10.0%), ‘매우 작다’(3.3%) 등의 순으로 응답비율이 높았다.

또한 공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응답은 ‘크다’(46.7%), ‘매우 크다’(21.7%), ‘보통이다’(21.7%)의 분포를 보였다.

공사 단가 부당삭감에도 보상은 미미

그렇지만 발주자의 불공정 행위에 대한 문제제기와 피해보상은 매우 미약했다.
일례로 ‘공사계약 일반조건’의 14개 항목과 관련, 계약자 권리에 대한 피해를 경험한 사례는 총 378건으로 피해발생 비율이 평균 46.6%에 달했다. 하지만 피해사례 중에서 계약적 권리를 보상 받은 경우는 평균 6.5%에 불과했다.

‘공사계약 일반조건’과 관련한 피해 유형별로 살펴보면 △설계변경 관련 계약금액의 조정(55건) △공기 연장 간접비 보상 등 기타 계약내용으로 인한 계약금액의 조정(45건) △공사 용지의 확보(34건) △휴일 및 야간작업에 대한 보상(33건) △계약기간의 연장 승인(33건) 등의 순서로 피해사례가 빈번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응답자의 85.9%가 설계변경 불인정, 단가의 부당삭감 등 설계변경 관련피해를 경험함에도 불구하고, 피해발생 후 보상을 받은 경우는 16.4%에 그쳤다.

또한 응답자의 76.3%가 발주자의 잘못으로 공기가 연장돼도 이에 따른 간접비를 보상받지 못하는 등 계약금액의 조정과 관련한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피해발생 후 보상을 받은 비율은 17.8%에 불과했다.

또한 응답자의 56.9%가 휴일 및 야간작업에 대한 비용을 보상받지 못하는 피해를 입었지만, 실제 보상을 받은 비율은 9.1%에 그쳤다.

발주자, 시공자에게 업무전가 ‘비일비재’

‘공사계약 특수조건’의 부당 특약과 관련한 피해 및 보상경험에 대한 조사결과도 닮은꼴을 하고 있다.

시공자는 다양한 유형의 피해를 경험하고 있으나, 권리행사에 따른 보상을 받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우선 ‘공사계약 특수조건’의 부당 특약으로 간주되는 10개 항목에 관해 응답자가 피해를 경험한 사례는 총 148건이며, 피해발생 비율은 최대 53.6%, 최소 6.0%, 평균 27.3%로 나타났다.

부당특약의 유형별 실태를 살펴보면 △발주자 수행 업무를 시공자에게 전가하는 특약(30건) △계약조건의 해석은 발주자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특약(27건) △설계변경 시 부당한 협의 기준 단가에 대한 특약(26건) △공기연장 간접비 청구를 제한하는 특약(17건) △공사 중 불공정한 합의서 징구(14건) 등의 피해가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설문 응답자의 53.6%가 발주자의 업무를 시공자에게 전가하는 부당특약의 피해를 경험한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해발생 이후 보상을 받은 경우는 전혀 없었다.

또한 응답자의 49.1%가 계약조건의 해석은 발주자에 따르도록 강요하는 특약의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그렇지만 피해발생 이후 보상을 받은 비율은 3.7%에 불과했다.

아울러 응답자의 47.3%가 설계변경 시 부당한 협의 기준 단가에 대한 특약의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피해 발생 후 보상을 받은 비율은 7.7%에 머물렀다.

이 밖에도 응답자의 69.8%가 계약적 의무 사항으로 포함되지 않은 인허가 관련업무를 대행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에 대한 보상사례는 전무 했다.

시공자 권리주장 자체가 봉쇄 또는 무마

그렇다면 ‘을’의 위치에 있는 시공자가 발주자의 불공정 관행 또는 우월적 지위 남용에 대해 당당히 문제를 제기하고 피해를 보상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권리청구 또는 피해보상에 실패한 사유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발주자와의 관계 악화 또는 후속사업에의 영향 등을 우려한 청구 자체의 포기’가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당한 피해를 입어도 후환이 두려워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문제를 지나치고 있는 셈이다.

그 다음으로 “발주자가 해당사안에 대한 반려 또는 무마를 시도해 시공자의 이의(클레임) 제기 자체가 차단된다”는 답변이 그 다음 순위를 차지했다.

응답자가 답변한 결과를 종합해 보면, 시공자가 자신의 권리행사에 대한 청구를 하지 않거나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밑바탕에는 시공자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외부적 요인이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발주자의 직·간접적 영향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당한 문제제기나 피해보상을 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에 갇혀 있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 김원태 건산연 연구위원은 “내·외부 감사 등에 따라 외형적으로는 발주자의 불공정 관행 및 우월적 지위 남용에 관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계약상대자인 시공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봉쇄되거나 무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김 위원은 “단위현장의 성과평가가 예산절감 위주로 이뤄지기 때문에 발주기관의 계약 담당자는 현행제도의 맹점을 이용하는 등 부당행위가 반복된다”고 강조했다.

적정예산 확보-적시 투입 등 다각적 대책 필요

보고서는 향후 발주자의 불공정한 관행 및 지위 남용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대안도 모색했다.
먼저 보고서는 제반문제에 대한 정부의 깊이 있는 인식과 이를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무엇보다 사업의 효율성 차원이 아닌 단기적 예산절감 원칙에 입각한 한 성과평가체계에 대한 근본적 개선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건설산업에서 공정한 거래질서의 확립은 요원한 과제로 남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보고서는 계약상대자(건설업체)가 정당한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정부의 예산절감 기조에 입각한 발주기관의 경영평가와 계약담당 공무원의 인사고과 평가체계 등에 있다는 설문조사 결과에 주목했다.

이에 따라 공공공사에서 사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공정거래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적정 예산을 확보해 적시에 투입할 수 있는 체제가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피해발생 빈도가 높은 사안에 대해서는 계약당사자의 권리와 의무, 책임한계 등을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불공정 계약 또는 우월적 지위 남용사례의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기존 법령 및 제도 등의 규정 개선만으로는 현재의 불공정 관행과 발주자의 지위 남용을 근절할 수 없으며, 실질적 제도의 집행력을 강화할 수 있는 현장차원의 장치를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공정거래 질서 확립을 선도하는 공공 발주기관과 계약담당 공무원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공공 발주자가 자발적으로 문제점을 시정하도록 유도해야한다고 덧붙였다.

보고서는 발주자 차원의 시사점도 제시했다.

특히 상호 호혜적 계약관리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발주자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며, 발주기관의 계약담당공무원을 대상으로 한 교육기능의 강화가 요구된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시공자는 계약관리 역량을 강화해 계약적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하며, 업계 차원의 조직적 대응을 위한 불공정 계약신고센터의 설립 및 운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끝으로 보고서는 발주자의 불공정 관행 및 지위 남용에 따른 피해를 전가시키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건설산업의 경제민주화는 공급망 전반의 공정한 거래질서가 확립될 때 진정한 효과가 창출될 수 있으므로, 발주자와 원도급자 간의 문제가 하도급 단계로 부당하게 전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보고서는 종합건설업체가 받은 피해가 다시 불공정한 하도급 계약을 통해 전문건설업체에게 전가되고 있는 상황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원도급 건설업체가 권리를 행사하는 명분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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