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신문=박남수기자]
산업 격변기를 맞아, 각국의 미래 경쟁력은 인공지능(AI) 개발 역량으로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됐다. AI 성능은 투입되는 데이터의 양과 질로 결정되므로, 국가는 개발 기업이 다양한 데이터를 더 쉽고 빠르게 확보할 수 있게끔 길을 터줄 필요가 있다. 문제는 필요한 데이터 중 상당수에 저작권이 걸려 있다는 점이다. 개발 기업이 저작권으로 인해 충분한 학습 데이터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해당 기업뿐 아니라 전체 사회의 공익이 저해된다. 그렇다고 저작권이라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기업이 임의로 침해하게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그렇기에 사회는 AI 개발의 효율성과 저작권 보호의 원칙, 양쪽 모두가 최대한 보장되는 선에서 제도 기준을 만들어 균형을 잡아야 한다.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영미법계 국가는 기본적으로 공정이용(Fair Use) 원칙을 따른다. 저작권 이용에 대해 아주 포괄적인 기준만을 두고, 개별 사안에서 문제가 생기면 법정에서 옳고 그름을 다투는 방식이다. AI 개발을 할 때라면 개발사가 일단 필요한 데이터를 가져다 쓰되,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재판을 통해 계속 사용 여부나 피해 보상 문제 등을 결정해야 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개발 기업은 다양한 데이터를 사용한 연구 개발 과정에서 늘 법적 분쟁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EU, 일본, 싱가포르 등 여러 나라에서 TDM(Text and Data Mining) 면책 제도를 도입했다. AI 개발 과정에 한해 특정 범위 내에서의 저작권 침해를 문제 삼지 않는 방식이다.
이 제도 도입을 두고 국내에서도 이해관계자들 사이 논쟁이 격렬하다. 정부에서 조만간 이에 대해 일정한 가이드라인을 내놓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현재로서는 TDM 면책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가 조금 더 강해 보인다. 각종 저작권이 보호하는 문화 콘텐츠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점, 그리고 개별 저작권자가 데이터 사용 거부 의사를 밝히는 절차를 새로 만들어야 하는 등의 현실적 어려움 때문이라고 한다.
제도 배제의 이유가 이런 것이라면 업계 입장에서 답답하다. 과연 EU나 일본은 문화의 가치가 우리만큼 중요하지 않아서, 혹은 없던 절차를 만드는 일이 그들에게만 너무 쉬워서 TDM 면책을 도입했을까? EU의 경우 면책 제도 도입은 이해당사자가 공론장에서 수년 동안 논쟁하고 협의하여 이루어낸 결과다. 그런 논의가 EU에서는 가능했고 우리에게 불가능하다면, 그 차이는 현실적 어려움의 크기보다는 공공의 결단력, 정치적 용기의 문제가 아닐까?
미국이 공정이용을 유지하는 것은, 소송과 판례를 거쳐서 법적 원칙을 사후적으로 수립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우리의 법 제도는 대륙법 체계를 기반으로 한다. 대륙법 체계는 규정을 사전에 명확히 만든 후 안정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이다. 데이터 학습 과정에서 ‘일단 갖다 쓰고 나중에 소송을 통해 가부 여부를 다투는’ 방식은 우리의 통념이나 관행에 잘 맞지 않고, 법률적 생태계도 첨예하게 다른 환경이다. 연구 개발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
기업으로서 소송의 리스크는 그 자체로 큰 비용이다. 실제로 글로벌 플랫폼·기업에서 이런 리스크를 피해 명시적 법 규정이 완비된 국가로 연구 개발 환경을 옮기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싱가포르가 우리와 유사한 공정이용 체계를 갖추고 있음에도 과감히 TDM 면책을 도입한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무조건 TDM 면책을 도입해야만 한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TDM 면책 도입으로 생기는 이점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TDM 면책을 먼저 도입한 국가들이 데이터 확보 면에 상대적 우위를 지니게 되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상쇄할 만한 다른 제도적 이점이 있느냐이다. TDM 면책이 도저히 안 된다면 그로 인해 발생하는 격차를 해결할 대안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AI 산업의 미래를 위해 지금 필요한 제도가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TDM 면책을 배제한다고 하더라도, 배제의 이유가 단지 당면한 갈등과 논란을 일단 회피하기 위한 것이어선 안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