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19:26 (금)
[기자수첩] 이공계는 서글프다
[기자수첩] 이공계는 서글프다
  • 차종환 기자
  • 승인 2024.01.26 18: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정보통신신문=차종환기자]

학창시절 필자는 나름 공부 좀 하는 축에 속했지만, 성적으론 도저히 이길 수 없었던 친구가 있었다.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그의 등수는 한자릿수 이상을 넘어간 적이 없었다. 전국 등수였다.

그 친구가 공부하는 걸 보면 그럴 만도 했다.

예로, 그는 보통의 고등학생들이 수학 정석이나 뒤적이고 있을 때 생전 본적 없는 무슨 목침만 한 수학책을 풀고 있었다. 나중에 대학교 들어와서 알게 됐는데 그것은 ‘공업수학’ 책이었다.

그는 이미 경쟁을 논할 ‘클라쓰’가 아니었다.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있는 한 우리나라 이공계의 미래는 밝다. 세계적인 과학자가 나올 것이다. 내친김에 노벨상도 노려보자. 지금이라도 사인을 받아 놔야 하나, 나 혼자 설레곤 했다.

그러더니 그는, 의대를 갔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는 그렇게 우수한 인재 하나를 잃었다.

그때가 20여년 전이지만 의대 쏠림 현상은 현재진행형이다. 심지어 정부가 화룡점정을 찍었다. 올해 과학기술계의 R&D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것이다.

그보다 더 서글픈 건 정부의 시선이다. 소위 ‘R&D 카르텔’이 존재한다는 인식이다.

최근 5년간 R&D 예산이 급격하게 증가하며 경쟁력 없는 사업에 관행적으로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의 비효율이 발생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투자 규모에 비해 발표되는 논문이 적거나 기술의 상용화가 이뤄지지 않는 등 가시적인 성과가 보이지 않는 것도 그에 속한다는 주장이다.

과학기술계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혔다. 정부가 R&D 현장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성토다. 행여 카르텔이 있다면 감사나 고발 조치를 취하면 될 것인데 전체 R&D 예산을 삭감해버리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 지적이다.

심지어, 정부 말대로라면 돈 되는 연구만 하라는 얘기가 된다. 가뜩이나 원천기술이 부족해 선진국들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은 우리나란데 기초과학을 탄탄히 다질 기반은 더욱 묘연해졌다.

R&D라는 게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던가. 신규 프로젝트는 고사하고 몇 년째 이어오던 연구과제까지 중단되게 생겼다. 기술로 먹고 사는 나라가 R&D에 돈을 쓰기 싫다는 초유의 사태라 할만하다. 삭감은 33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수 인재들이 의대로 쏠리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적어도 의사라면 사회적으로 많은 존경과 존중이라도 받으니 말이다.

돈이 없어 연구를 못하고 예산 따느라 눈칫밥이나 먹어야 한다면 누가 이공계에 발을 들여 놓겠는가. 이미 문을 닫는 연구기관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다는 전언이다.

우수 인재의 불균형은 어느덧 국가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향후 10년간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국가 핵심 먹거리 산업에 필요한 인력 수요만 32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정부가 나서서 과학기술을 홀대하는데 우수 인재가 몰릴 리 만무하다.

잊을만하면 뉴스를 장식하는 기술유출 범죄는 또 어떤가. 자국에서 인정받지 못하는데, 다른 나라에선 몇배의 몸값으로 대우해준다면 누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이 과연 애국심에만 호소할 문제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쯤되면 그 친구의 의대 진학이 얼마나 선견지명이었는지, 역시 똑똑한 녀석은 다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인터넷 신문 등록 사항] 명칭 : ㈜한국정보통신신문사
  • 등록번호 : 서울 아04447
  • 등록일자 : 2017-04-06
  • 제호 : 정보통신신문
  • 대표이사·발행인 : 함정기
  • 편집인 : 이민규
  • 편집국장 : 박남수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 308 (한국정보통신공사협회) 정보통신신문사
  • 발행일자 : 2024-04-26
  • 대표전화 : 02-597-8140
  • 팩스 : 02-597-822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민규
  • 사업자등록번호 : 214-86-71864
  • 통신판매업등록번호 : 제 2019-서울용산-0472호
  • 정보통신신문의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11-2024 정보통신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oit.co.kr
한국인터넷신문협회 인터넷신문위원회 abc협회 인증 ND소프트